잔 다르크는 왜 성녀에서 마녀가 되었을까?

[출처: 위키피디아]


서론

잔 다르크(Jeanne d'Arc)는 중세 프랑스의 역사적인 인물로, 성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 마녀로 여겨져 형사재판을 거쳐 처형되었습니다. 이러한 잔 다르크의 변천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다양한 이론과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잔 다르크가 왜 성녀에서 마녀로 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1. 잔 다르크의 역사적 배경

먼저, 잔 다르크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잔 다르크는 15세기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백성들 사이에서 천사와 대화한다는 등의 이상한 소문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녀는 프랑스가 점령한 영토를 되찾고 싶어했으며, 이를 위해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군사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잔 다르크는 1429년 시농에서 프랑스 왕이 된 샤를 7세를 만나 자신의 비전과 목표를 전하였고, 이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영광스러운 전장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잔 다르크는 어둠의 그림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2. 잔 다르크가 마녀로 변하는 과정

2.1 종교적 논쟁과 비방

잔 다르크는 그녀의 탁월한 지도력과 군사적인 업적으로 프랑스인들의 영웅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중심이 되는 힘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존재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으로 작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녀는 종교적인 논쟁과 비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천사와 대화한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신성한 지위를 의심받게 만들었고, 그에 대한 비난과 의혹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그녀를 제거하고 그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반대 세력은 그녀를 마녀로 비난하고자 했습니다.


2.2 마녀 사냥의 시작

1429년, 잔 다르크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의 영토를 크게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4월에 잔은 콩피에뉴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습니다. 1430년 5월 23일 잔은 마리니에 있는 부르고뉴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포로로 사로잡혔습니다. 부르고뉴파에서 6천 명을 추가로 병력을 보내오자, 잔은 병사들에게 콩피에뉴 성으로 피신하라고 지시했고 자신은 전장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후퇴하는 병사들의 뒤를 지켰습니다. 부르고뉴군은 후방에서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잔 다르크를 철저하게 고립시킨 다음, 활을 쏴서 말에서 떨어뜨려 사로잡았습니다. 처음에 잔은 항복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생포 되었습니다.


2.3 잔다르크의 체포와 형사재판 [위키피디아 참조]

잔다르크가 부르고뉴군에 생포되자 잉글랜드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녀의 신병인수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잉글랜드는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몸값을 지불하면 포로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잉글랜드는 종교재판을 통해 잔을 마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하게 되면 샤를 7세는 악마와 동맹을 맺고 마녀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되므로 권위와 정통성에 흠집을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관심을 보인 이유는 잔다르크가 신과 직접 소통한다며 교회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샤를 7세는 잔다르크의 석방 혹은 구출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샤를 7세는 훗날 역사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잔은 억류되어 있는 동안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였습니다. 베르망두아에 있을 때는 높이가 21미터나 되는 탑에서 해자로 뛰어내린 적도 있었는데, 결국 도로 붙잡혀 부르고뉴파에 속한 아라스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잉글랜드는 1만 리브르를 지불하고 부르고뉴로부터 잔 다르크의 신병을 넘겨받았고 1430년 12월에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가 지배하고 있던 루앙으로 이감되었습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간의 잔에 대한 거래에서 보베의 교구장이자 친잉글랜드파인 피에르 코숑 주교가 큰 역할을 하였으며, 나중에 잔을 상대로 한 종교재판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습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은 명목상으로는 그녀의 이단성 시비여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열렸습니다. 베드포드 공작은 조카인 헨리 6세의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잔의 활약으로 맞수인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잔에 대해 앙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을 이단 혐의로 공격하는 것은 곧 그녀가 옹립한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하여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1431년 1월 9일 잉글랜드의 점령지역인 루앙에서 열렸습니다. 


이 재판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재판이었습니다. 훗날, 당시 법정에 참석했던 관리들은 잔 다르크의 재판에 사용된 증거들 중 많은 부분은 그녀에게 불리하도록 조작된 것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종교재판관 장 레메트르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가 잉글랜드측의 갖은 회유와 압력을 받아 재판을 진행하였으며, 심지어 개중에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또한 종교재판의 규정상 여성 죄수는 수녀가 관리 감독하는 특별 시설에 수감되는 것이 통례였는데, 잔은 잉글랜드인 병사들이 지키는 일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썩은 음식을 먹다가 식중독에 걸리거나 병사들의 구타와 폭행에 시달렸습니다다. 심지어 코숑 주교는 잔이 교황에게 항소할 기회마저 막아버렸습니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자문관을 구성했습니다.


코숑 주교는 마지막에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습니다. 당시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종교적인 죄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남장은 남성들이 많은 군대에서 제대로 근무할 수 있기 위해, 또한 유사시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며 반박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후에 그녀는 법정의 명령에 따라 여자 옷을 입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감옥을 찾아온 한 잉글랜드 영주가 그녀를 강간하려고 시도하자 다시 남자 차림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후로 잔 다르크는 사형을 당할 때까지 머리를 자르고 남자 복장을 했습니다.


오랜 재판 끝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잔 다르크는 곧바로 처형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이단은 초범인 경우에는 경범죄에 해당하지만, 재범인 경우에는 중죄로 다루어졌습니다. 잔은 각서에 서명할 때 여성의 옷을 입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법정에 선 그녀는 재판관에게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잉글랜드의 귀족이 감옥에 들어와서 자신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더군다나 여성의 옷을 빼앗겨 달리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에 잔은 다시 남성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431년 5월 29일 법정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선고했습니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의 비외 마르셰 광장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장대에 밧줄로 묶겼습니다. 잔 다르크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수사들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십자고상을 높이 들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수사들은 잔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한 소작농 역시 잔을 애석하게 여겨 그녀 앞에 작은 십자가를 놓았습니다. 잔이 숨을 거둔 후에 잉글랜드군은 불을 끄고 새까맣게 그을린 그녀의 시신을 공개 전시하여 아무도 그녀가 살아서 빠져 나갔다는 말을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군중이 그 유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다시 시체를 세 번이나 불에 태워서 잿더미로 만든 후에 센강에 내다버렸습니다. 


3. 잔다르크의 사후 복권 [위키피디아 참조]

3.1 백년 전쟁의 종결

1431년 12월 16일에 프랑스 파리의 노테르담 성당에서 헨리 6세(생몰 1421-1471)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루었지만,[52] 샤를 7세는 흔들림없이 자신의 정통성을 유지하였습니다. 1435년 아라스 조약이 체결됨으로 인하여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의 동맹은 와해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베드포드 공작이 사망하고, 헨리 6세는 섭정 없이 잉글랜드를 통치한 역사상 가장 젊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6세의 유약하고 무능함으로 인하여 두 나라간의 분쟁은 빨리 종결되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사망하고 나서도 22년이나 더 지속되던 전쟁은 프랑스군이 1437년 파리, 1449년 루앙을 회복했고, 1453년 사실상 종료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하고 모두 빼았겼다. 켈리 드브라이스는 잔 다르크가 고안한 포격술과 적극적인 전방공격은 프랑스군의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남은 전쟁기간에 효과적인 전술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2. 재심과 명예회복

잔 다르크에 대한 재심은 전쟁이 끝난 후에 열렸습니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대심문관 장 브레알과 잔 다르크의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잔 다르크의 혐의에 대한 재조사 및 종교재판을 실시한다고 포고하였습니다. 재심의 목적은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조사는 1452년 시작되었으며, 기욤 부유 신부가 조사관을 맡았습니다. 공식적인 항소는 1455년 11월에 제출되었습니다.


항소에는 유럽 전역의 성직자가 대거 참여하였으며, 교회법에 따른 표준 법정 절차가 준수되었습니다. 신학자로 전원 구성된 배심원들은 115명의 증인들의 증언 및 증거자료들을 비교 분석하였습니다. 대심문관 브레알은 1456년 6월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보고서에 그는 잔 다르크를 순교자로 선언하고, 피에르 코숑 주교에 대해서는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무죄한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간 이유를 들어 이단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 1456년 7월 7일 항소심에서 잔 다르크의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3-3. 재심의 정치적 의도

잔 다르크에 대한 사후 복권은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진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잔 다르크의 도움에 의해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7세에게는 그녀를 복권 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마녀로 남아 있을 경우에 샤를 7세의 정통성에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교황청의 공식적인 승인하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샤를 7세는 교회가 마녀로 규정한 악마와 동맹을 맺고 그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샤를 7세는 잔다르크를 복권시킴과 동시에 다시 한 번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청은 샤를 7세의 재심요구를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 잉글랜드가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교회가 내렸던 결정을 다시 뒤집어야 했기에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습니다. 곤경에 빠진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어머니로 하여금 교황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사안을 비정치화하는 외교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의 종교재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 코숑 주교, 종교 재판소의 대표 장 르메트르, 종교 전문가 장 에스티베등 잔 다르크를 재판했던 판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심 진행을 관철시켰습니다.


3-4 현대적 평가

현대 역사학자들은 잔다르크의 사건을 다시 조명하고, 잔다르크를 현실적인 맥락에서 재평가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 그리고 여성의 역할에 관한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잔다르크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평가를 통해 잔다르크는 종교적인 이상상과 실제의 조화를 이루는 인물로서 각종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결론

잔다르크가 왜 성녀에서 마녀로 변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증거와 현대적인 평가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정치적인 압력과 종교적인 편견이 그녀의 명예와 신분을 훼손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잔다르크의 이야기는 인간의 복잡한 역사와 그 안에서 이뤄진 정치적인 힘의 경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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